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문단 편집)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그러나 이러한 아민의 폭력적 독재에도 아프가니스탄 정국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정국 불안은 근접해 있던 소련을 더욱 더 자극했다. 소련 정계 내부에서는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내분을 방치하면 아프간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이슬람 인구가 밀집한 소련 남부의 공화국들에 영향력이 미칠 가능성을 우려한 데다가 친소파였던 아민이 사실 [[미국]] 유학 시절 [[미합중국 중앙정보국|CIA]]에 포섭된 친미파여서 미국에 접근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참고로 이 소문은 아민을 압박해 아프간의 공산화를 더 촉진하기 위해 [[KGB]]가 아민의 반대파들을 선동해서 퍼뜨리게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퍼뜨린 소문에 [[인지부조화|자신들이 속아넘어간 것이다.]]] 무력 침공 계획을 수립하였고 결국 [[1979년]] 12월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국내 내분 종식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카불을 점령하고 아민 일가는 소련에 의해 파견된 [[KGB]] 요원들에게 사살당하고 말았다.[* 여담으로 친소파였던 아민은 소련군이 자신을 죽이러 온 줄도 모르고 소련군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그는 살해된 이후 [[미국]]의 앞잡이로 격하되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아민을 살해한 소련은 타라키와 아민과의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나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어 버린 바브라크 카르말을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시켜 새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을 위성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국내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란군들은 서방의 지원을 받아 모든 총부리를 아프가니스탄 점령 소련군에 돌려 공격하였고 결국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 아프가니스탄 반란군과 소련군 사이의 전쟁터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된 카르말은 공산 독재 통치를 어느정도 완화하면서 국내 내정 안정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부군의 전력을 강화하는 등 [[소련군]]과 합동으로 정부 통치에 저항하는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 토벌 작전도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카르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좀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더욱이 국내 영토 장악에도 실패해 결국 수도 카불과 일부 지역들을 제외하고 모든 아프가니스탄의 지역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결국 카르말은 소련군과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 사이에 전쟁이 절정에 달하던 [[1987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소련으로 망명했고 그의 뒤를 이어 카르말 정부 아래에서 비밀경찰 국장을 맡고 있었던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공산권이 붕괴되고 있던 세계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이 된 나지불라는 공산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완화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폐지하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도입했고 억압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도 대폭 완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국호도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 예전의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으로 개정하고 유일한 정당이었던 집권 인민민주당도 해체했다. 그동안 내전으로 인한 적대 세력이었던 무자헤딘 반란군 세력들에게 화평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지불라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거의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의 대부분을 구 인민민주당 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무자헤딘들은 나지불라의 화평 제의를 거부했고, 나지불라의 이런 정책들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